좋은 전쟁이란 없다. 그리고 나쁜 평화란 없다.

2023. 6. 11. 11:30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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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말이 되자 시대의 유행색은 흑백이 되었고, 승리가 거리의 법칙이 되었으며, 언론에서는 전투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회의의 색인 수수한 회색은 영향력을 잃었다. 국적을 막론하고 모든 국수주의자들은 자국에 환호를 보냈다. 규율, 희생할 각오, 복종, 의무 수행과 같은 미덕들이 모두 병영에서 나왔다. 전쟁 발발에 즈음해 발표된 독일 국민에게 보내는 황제의 외침은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수사로 가득 차 있었다. "따라서 어떤 검을 들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평화를 깨고 적이 우리를 습격했다. 그러므로 일어서라! 무기를 들라! 흔들리고 주저하는 사람은 조국에 대한 반역자다."

영국에서는 병역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직업군인들이 큰 피해를 입자 19세 이상 38세 미만의 남성을 대상으로 신병을 모집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출신을 비롯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무리를 지어 신고했다. 황량한 일터를 떠나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프랑스로 가서 시합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때마침 여성해방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과격 여권론자들은 병역의무 도입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여권론자들은 거리에서 군복을 입지 않은 젊은 남자를 만나면 그에게 흰 깃털을 건네곤 했다. 전선으로 떠나지 않은 남자는 겁쟁이라는 의미였다.

'유럽인에게 보내는 선언'이라는, 평화를 위한 반론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유명한 학자는 단 한 사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뿐이었다. 그는 명성 높은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인스티튜트에 막 부임했던 차였다. 자기 생각을 그렇게 공적으로 유포한다면 탄압하겠다는 협박이 없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냉정했다. "평화주의는 나를 지배하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어떤 식의 이론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증오와 잔혹성에 반대하는 마음 깊은 곳의 저항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단순한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투쟁적인 평화주의자였다. "평화와 같이 자신이 믿는 어떤 것을 위해 죽는 일이 전쟁과 같이 자신이 믿지 않는 어떤 것을 위해 괴로워하는 것보다 더 낫지 않은가? 대중은 선전에 중독되지 않는 한 결코 전쟁을 열망할 수 없다."

8월 14일 사회주의 주간지인 『뉴 스테이츠먼』에 실린 조지 버나드 쇼의 진지한 제안을 사람들은 잘 포장된 농담 정도로 간주했다. 수상인 애스퀴스는 쇼를 반역죄로 고발하여 군사재판을 받게 하려고 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쇼의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모든 부대의 병사들은 장교를 총으로 쏘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와 유사한, 단순하고 매력적인 아이디어를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15년 후에 소설《서부전선 이상없다》의 한 인물을 통해 제시한다. 소설 속의 자원병 크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선전포고는 일종의 국민축제가 되어야 해. 투우경기에서처럼 입장권과 음악이 있는 축제 말이야. 경기장에는 수영복을 입고 몽둥이를 든 양국의 장관과 장군들이 선수로 등장하지. 거기서 서로 싸워서 남은 사람의 국가가 승리하는 거야. 여기서 엉뚱한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나은 방법이잖아."

독일 표현주의 화가이자 반전주의자였던 오토 딕스는 전쟁에 열광하여 자발적으로 전선에 뛰어든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의 현실을 냉정하게 깨달은 것처럼, 자신의 참전 경험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했다. "이, 들쥐, 가시철조망, 벼룩, 수류탄, 지뢰, 지하실, 시체, 피, 생쥐, 탄환, 폭탄, 화염, 악마의 소행, 전쟁의 진짜 모습" 그들은 모두 집으로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사령관들은 도살을 계속하기를 원했다. 비용도 들지 않고 사태를 훨씬 단순하게 하며 수천 명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말이다. "잔인무도한 장군들,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그들 모두를 미워했습니다." 병사들은 온종일 자신들이 죽어나가는 시간에도 따뜻한 별장에서 파티를 벌이고 있을 장군들에 반항해서 적군 참호 위 공중에 총을 쏘았다.

1914년 8월 유럽인들이 빠져 있던 저 열광은, 12월에 사망자 수가 총 백만을 넘어서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전쟁은 시체를 생산했다. 900만 명 이상이 대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변소. 질 낮은 식사. 피 냄새. 썩는 냄새, 인간과 쥐와 말 냄새, 수류탄 타는 냄새. 시체 위에서 양귀비가 피어났다. 전쟁은 악취를 풍긴다.『데일리 미러』의 필자가 쓴 글은 게재되지 못했다. "병사의 마음속에는 증오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는 것이다. 전쟁의 이유,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단합된 힘으로 모두 함께 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고 사실 그들은 총알받이에 불과하다. 그들은 알고 있다. 개개인은 전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증오는 오히려 후방에 자리잡고 있다. 병사들은 전투가 미친 짓이라는 점을 분명히 본다. 그래서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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