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9. 15:22ㆍ글귀
감춰진 커리큘럼이라는 개념은 단순하고 자명하다. 그리고 흔히 무시된다. 학생들은 배우는 무엇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배우는가에 대해서도 학습한다. 학생들은 충실한 정보로 가득 찬 민주적 가치에 관한 과목을 수강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교사가 그 정보를 받아쓰게 하고 학생들이 그것을 달달 외워 시험에 적도록 한다면, 그들은 민주적인 가치를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그들은 독재의 추종자로 살아남는 것을 배우고 있다.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그것을 이해하거나 믿는 것에 상관없이 정당의 강령을 읊조리는 것 말이다.
교실 안에 있는 관계의 역동이 주는 영향은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위해 암기한 정보보다 오랫동안 지속된다. 너무 많은 학생이 교실에서 교사의 퍼포먼스에 대한 단순한 관객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탐구와 발견과 상호 창조의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가하기보다는 전문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분명히 말하건대 이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시민을 키워낼 수 없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뒤로 물러앉아 프로가 뛰는 모습을 지켜보는 관람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학을 개혁하려면 그 뿌리가 되는 시스템을 이해해야 한다. 교육은 전문 지식에 대한 숭배에서 발생한다. 전문 지식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어느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고, 그 지식은 존중받아야 한다. 문제는 숭배라는 작은 단어에 있다. 전문가에게 구루의 목소리를 부여하면 그 목소리만 중요해진다. 그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신감 심지어 발언의 충동마저 빼앗아버린다. 그 결과 파고드는 질문은 질식되고, 반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으면서 전문가는 도전받지 않게 된다. 전문가 자격의 이득을 누리지 못하지만 깊은 경험적 지식을 지닌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애매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안는 방법을 결코 배우지 못한다. 전문 지식의 숭배 속에서 확실성에 대한 주장만이 있을 뿐이다.
전문가 숭배는 교육의 임무를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쇠퇴시킨다. 그러나 이 숭배의 뿌리는 깊다. 과학 그 자체만큼이나 깊은데 이는 아이러니로 가득 찬 사실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과학의 발생이 새로운 사제 계급과 권력자들을 출현시켰다는 것이다.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과학자는 아주 드물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그들에게 권위를 투사한다. 그 결과 우리로 하여금 주관적인 진리의 미개한 문화를 초월하도록 하면서 민주주의에 기여했던 바로 그 과학이 독재의 발생을 지지하는 대중적인 심성을 창출하기도 했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문외한이다. 그 방면에 전문가가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그 권위에 의사결정을 맡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가끔 사제와 권력자와 수동적인 대중의 시대로 돌아간 듯 느낀다. 특히 정치와 경제에 관한 대중 담론에서 그러한데, 자칭 전문가들이 자주 큰 목소리로 되풀이하는 거짓된 확실성을 많은 사람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 관점에서 볼때, 뉴스에 전혀 토를 달지 않는 수동성은 학문적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진리에 전혀 토를 달지 않는 수동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렇듯 과학의 축복이 이면에 어둠을 지니고 있음을 감안할 때 학교가 과학교육으로 치닫도록 압박을 받으면서 비관습적인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질문을 파고들도록 요구하는 인문학을 희생시킨다면 민주주의는 위험에 빠진다. 그 압박은 수학과 과학만이 중시되는 기술 사회에 학생들을 대비시키는 것이 교육의 주요한 목적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중 일부는 교육적인 설명 책임에 대한 요구에서 비롯되는데, 교육의 결과가 측정 가능해야 함을 의미한다. 취직이 잘되는 졸업생들을 배출하는 것은 가치 있는 목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과 수학교육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교육자들이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 역시 또 하나의 가치 있는 목표다.
그러한 방향으로 밀어붙이다 보면 인문학에 대한 교육적 편견이 생긴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철학, 문학, 음악, 예술 과목은 취업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과목들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측정하기가 어렵다. 인간 감각의 미묘한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민주주의의 미래에 핵심적인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기에는 겸손함, 뻔뻔함 그리고 창조적으로 긴장을 끌어안는 능력이 포함되는데, 이 모든 것이 전문 지식의 숭배에 맞서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작가 마크 슬루카는 그 핵심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서술한 바 있다.
"인문학을 변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제대로 실행된 인문학은 온전한 인간에 대한 관념이 시험되는 도가니다. 인문학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점진적으로 끊임없이 가르친다. 그 방법은 직면하게 하는 것이고, 이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이성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불가피하게 정치적이다. 왜? 우리의 비전을 복잡하게 만들고, 소중하게 간직해온 생각들을 뿌리째 뽑아버리며, 독실한 믿음을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즉 불확실성이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다. 관용의 경계를 긋고 다시 긋도록 강요하면서까지 우리의 이해와 연민의 범위를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구축을 통해 복합성 앞에서 겸손할 수 있는 개인이 출현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질문을 통해 현성되고 곧바로 굴복하지 않는 개인, 강제에 저항하고 모든 형태의 조작과 선동에 맞서는 개인이 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인문학은 우리가 민주적 가치라고 부르는 것을 전달하는 최고의 메커니즘이다. 내가 아는 한 그보다 훌륭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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