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과 진보 사이, 잃어버린 민주주의《경기동부》

2023. 6. 16. 01:42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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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퇴거가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이루어지는 나라, 남아공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나라"

한 가톨릭NGO가 말한 이 무자비한 나라는 대한민국입니다. 가난한 주택소유자, 스쿼터, 세입자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적 진압이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이루어진 곳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우리나라였습니다. 수도권에서 무려 72만 명이 원래 살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이 무자비한 폭력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재개발 논리에 고통받는 서민의 아픔을 다룬 조세희의 명저《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배경이 되는 광주대단지(현재 성남시)가 그 중 한곳이었습니다. 60년대에 만들어진 광주대단지는 정부가 시행한 철거민 강제이주 정책의 가장 큰 희생양이면서, 군부독재에 대항해 민주화운동의 거점이 되는 의미있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폈고, 이는 급속한 자본축적을 가능케 했지만 그 대가는 노동자와 농민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농촌 경제가 몰락하면서 농민들은 살기 위해 도시로 모여야 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도시의 슬럼화를 야기합니다. 사람들은 하천 주변이나 산동네에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고, 이런 저임금 노동 집약적 산업화로 인해 나라는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의 방한때 도시의 슬럼가가 미디어를 통해 방영되면서 박정희 정부는 도시 미관을 위해 대대적인 도시 청소를 시작합니다. 이러한 도시 청소의 사례는 도시의 발달 과정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오스만은 시민생활 개선, 환경 회복, 도시 재생이라는 공공이익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토지수용권을 행사해 파리의 빈곤지역을 해체한 바 있습니다. 그는 비위생적 산업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여타 불만분자 대부분을 파리 중심부에서 쫓아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습니다.

1980~90년대 서울에서도 건설회사와 토지개발업자가 험상궂은 용역깡패를 동원해 달동네 주택을 대형 해머로 때려 부수고 주민을 몰아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50년대부터 가난한 사람이 거주하던 고지대 토지가 1990년대에 이르러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반란의 도시》p.51 

도시 미관을 위해서는 사라져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노동력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든것이 광주대단지입니다. 서울시는 제2의 서울을 만든다는 계획 하에 경기도 광주군에 있는 300만평의 땅으로 철거민을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러나 서울시가 보장한 '제2의 서울'은 지옥이었습니다. 허허벌판에 금만 그어놓은 상태였고 보조금도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주변엔 일자리도, 공공시설도, 상하수도도 없었습니다.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강제로 일자리에서 멀리 떨어져야 했기 때문에 하루종일 일해야 했습니다. 대단지에서 '산모가 갓난아기를 삶아먹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런 소문이 현실성이 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결국 광주대단지에서 박정희 정권중에 최초의, 최대의 봉기, 8.10사건이 일어납니다. 정부는 민감하게 반응했고, 이주민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다는 서울시의 답변에 봉기는 끝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 세력이었고, 실제 주민들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광주대단지 봉기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지만, 정부와 외부 사회는 주민들을 폭도로 생각했고, 빈곤과 범죄의 낙인을 찍었습니다. 주소를 성남으로 하면 취업이 잘 안됬고, 학생들도 범죄자들의 도시라고 가는것을 꺼려했습니다. 정부는 경찰과 정보 요원을 투입해 일상적인 억압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2014년인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데, 분당을 성남시에서 분리하자는 주민운동이 일어나는가 하면, 민주당이 광주대단지의 8.10사건을 인권운동이라 부르자 새누리당은 부끄러운 일을 자꾸 들춘다고 성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정부가 만들어낸 체계적인 지역 차별, 약자들이 모인 공간이라는 특수성은 성남시 주민들의 상대적 열등감과 소외감을 만들었고, 불만을 조직화하고 집단 행동으로 의사를 관철할 수 있는 '반사회 집단'으로 바뀝니다. 오랜 차별과 배제, 주민들의 동질감과 연대의식은 성남의 대학을 중심으로 커다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기틀이 됩니다. 저항의 도시 성남에서 성장한 학생들은 집단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집단적 정체성과 정통성을 유지했습니다. 학생들은 강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경기동부연합을 만들었고, 활동 무대를 중앙으로, 사회운동에서 정당 활동으로 성장했습니다.

범경기동부연합은 이념적으로 주사파이며, 경기동부연합의 실세로 알려진 이석기는 지하당인 민혁당 출신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지하당이라고 해서 관련 인물들이 모두 북한에 연계된 간첩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박정희도 여수, 순천 사건 때 남로당 활동으로 사형 선고까지 받았지만 북한에 연계되 간첩 활동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사건 역시 남민전의 반유신 투쟁이 북한의 혁명 노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지만 북한과 접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판명되 29명이 2006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남민전 사건으로 5년 형을 받은 새누리당 국회의원 이재오도 남민전을 민주화운동으로 이해했다. - p.168

경기동부연합의 특징은 패권주의와 종북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0년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에 들어가면서 PD계열과 대립했고, 결국 PD계열이 주도해 창당한 민주노동당의 실권을 잡게 됩니다. 정당제에서 어느정도의 권력투쟁은 필요한 일이지만, 경기동부연합의 패권주의는 너무 과도했습니다. 부정 투표 문제가 불거졌고, 승리하기 위해선 정체성마저 신경쓰지 않는 행보로 인해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갔고 결국 민주노동당은 몰락하게 됩니다. 새롭게 등장한 통합진보당에서 경기동부연합은 비례대표 부정 선거의 주범으로 몰리며 보수,진보,PD뿐만 아니라 다른 NL계열까지도 경기동부연합을 공격했습니다. 저자는 광주대단지부터 경기동부연합까지 이어지는 모습에서 '하위주체'적 특징을 보인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는 제3공화국 민중 투쟁의 양대 사건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기억에서 방치된 광주대단지사건에 대한 관심을 시작으로 광주대단지에서 만들어져 현재 진보진영의 최대 이슈메이커 중 하나인 경기동부연합에 대해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중화된 차별과 배제가 광주대단지의 집단의식을 만들었고, 그것을 계승한 경기동부연합 역시 자신 외의 세력을 모두 적으로 보는 진영논리, 억압된 상상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비참한 현실을 안겨준 군부독재와 국가보안법에 저항했던 진보주의자들이 어떻게 종북좌빨이 되었는가, 그들이 진보진영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경기동부연합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한국정치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여러 논점들을《경기 동부》는 효과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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