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개혁과 노동 유연화
노동시간의 다양화와 유연화는 노동자에게 양면적 의미를 가진다. 우선, 다양화와 유연화가 노동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반영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매력적인 장점이다. 개인들의 삶이 복잡해지고 가족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필요에 따라 자신의 노동시간을 조절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실제로 서구 사회에서는 이러한 장점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다양화와 유연화가 자본의 필요와 욕구를 반영할수도 있다는 점이다. 생산의 유연성이 강조되고 비용 절감을 최우선하는 상황에서, 자본은 노동시간의 유연한 배치를 통해 최대한 적은 인원으로 최대한 많은 이윤을 확보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본이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시간동안 일하도록 강제된다.
주목할 점은 개개인들의 시간주권이 점점 더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과 노동의 권력 균형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의 힘이 점점 더 약해지면서, 노동시간 단축은 역전되고 시간의 유연성은 높아지고 있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보호되는 시간의 범주가 존재해서, 주말에는 쉴 수 있었고, 한밤중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기대는 할 수 없다. 이처럼 시간에 대한 통제력의 감소는 곧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절대적/상대적 감소를 의미한다. 노동시간은 자연스럽게 증가한다.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장시간 노동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일을 하다보니 시간이 없다. 너무 바빠서 사는 것이 힘들다. 더 편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소비를 한다. 소비를 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즉, 소비에 대한 욕구가 더 많은 임금을 추구하고, 자연스럽게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진다. 노동과 소비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노동시간의 여러 변화와 맞물려, 시간을 측정하고 보상하는 방식도 변하고 있다. 노동시간에 따라 임금을 지불하는 임금노동제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노동을 시간이 아니라 생산량 혹은 건수로 평가하는 성과제의 확산이다. 이러한 성과제는 더 많은 노동시간과 더 높은 노동강도를 자발적으로 이끌어 내는 유인책으로 기능한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시간을 둘러싼 노동자들의 저항을 우회하고, 저비용 고이윤을 보장하는 획기적인 제도가 등장한 것이다. 성과제의 확산은 노동시간의 유연화와 맞물려 더욱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언제 일하고 언제 휴식을 취하는지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변화 속에서, 실질적으로는 노동시간이 연자오디고 있지만 도리어 임금 보상을 할 때는 노동시간을 휴식시간으로 간주해버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설령 노동을 했다 하더라도 이윤 확보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임금을 줄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한국 노동시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보다 실질 노동시간이 서구의 2배에 육박하는 초장시간 노동이다. 최근 통계를 살펴보면 평균 노동시간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장시간 노동자들이 줄어들고 있다기보다는 시간제 일자리로 대표되는 단시간 노동의 증가 때문이다. 즉 고용과 임금의 양극화와 더불어 노동시간의 양극화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최근 정부에서 장시간 노동 문제의 해결책으로 시간제 일자리 등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을 추진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노동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느냐에 따라 다양화와 유연화는 노동자에게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유연화는 빠르게 도입되는 반면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고려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시간의 유연화는 고용 및 임금의 유연화와 결합하여 낮은 질의 일자리를 양산하는 데 활용될 뿐이다. 유연화가 노동자의 시간주권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시간 통제력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제 일자리가 확산될 경우,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고용 창출이 고민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구조조정을 통한 고용 감소가 예상된다. 한편, 심야노동과 주말노동, 초단시간 노동 같은 비표준적 노동시간에 대해 더 큰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집중되면서 도리어 더 값싼 일자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해 사회적 보호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 시간 대비 효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가치를 평가절하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