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적 경기부양책의 문제점
경기 침체가 길어지고 깊어지면 먹고살 방법이 없다. 역사적으로 복지에 대한 투자를 기피해 왔다. 그 결과 실업급여를 포함한 국가 안전망이 매우 취약하다. 바로 이런 절박한 상황 덕분에 1990년 이전에는 경기 후퇴가 와도 생각보다 회복이 빨랐다. 평균적으로 생산은 경기가 저점을 찍고 나서 2분기 이후면 회복되었고, 고용은 8개월 후면 제자리로 돌아왔다. 물론 정부와 중앙은행이 경제 회복 정책을 동원하곤 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경제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비록 길지는 않더라도 은행, 기업 그리고 근로자들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1990~1991년의 경기 불황은 이 공식을 깨고 말았다. 예전처럼 경기 후퇴기를 거쳐 생산 성장률은 급속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고용은 그렇지를 못했다. 고용 회복 기간이 길어지자 실직자들의 상심도 당연히 늘어났다. 저축해놓은 돈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실직 기간은 길어지고, 실업 급여 수급 기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의료 보험이 없어 불안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살펴볼 때 유럽 대부분의 국가와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부분은 바로 실업 급여이다. 가뜩이나 시원찮은 실업 급여 안전망에 구멍까지 뚫려 있었다. 막상 실업자가 되었을 때 실제로 급여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절반도 되지 못했다. 급여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근무 연수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사표를 냈기 때문에, 노사 분규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등등 다양한 이유로 급여지급을 거절당했다.
그 이전의 후퇴와 다른 결과를 가져온 이유를 채용 과정의 변화에서 찾는 경제학자도 있다. 이전에는 경기가 회복되어 부족한 인원을 충원할 때, 기업은 언론에 구인광고를 내고 그 광고를 본 구직자는 우편으로 이력서를 보냈다. 이러한 채용 과정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시간이 많이 걸리다 보니 기업은 혹시 제때 채용을 못해 수요 증가분을 충족하지 못하고, 결국 모처럼 찾아온 매출 증대 기회를 놓치면 어떻게 하나 조바심을 냈다. 그런데 인터넷의 출현으로 채용 과정이 간편해졌다. 기업은 인터넷을 통해 채용 광고를 내고, 구직자도 그 광고를 보고 인터넷으로 이력서를 보낸다. 구인 과정이 간편해지면 기업은 당연히 채용 노력을 서두르지 않는다. 실업률이 높고 수요는 위축된 상황에서 일자리만 주면 달려올 인재가 사방에 널려 있는데 어떤 회사가 채용을 서두르겠는가? 저스트 인 타임 이론이 옳음을 입증하는 증거 중 하나는 경기 후퇴 이후 찾아온 회복 기간동안 기업의 임시직 근로자에 대한 의존율이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기업이 풀타임 인력 고용을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안전망 구축에서 동질성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다. "신의 은총이 없었다면 나도 저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사회 보장책을 확대하는 데 결정적인 논리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보통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 동질성을 지닌 사람에게 그 이익이 폭넓게 돌아간다고 믿는 경우, 다른 사람과 이익을 공유하기 위해 기꺼이 세금을 더 낸다. 사회 보장법 도입을 저지해온 정치인들은 납세자가 힘들게 번 돈이 무책임하고 게으른 빈곤층에게 돌아가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해왔다. 자신이 그런 한심한 유권자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 믿고 또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하는 정치인을수록 그같은 선동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최근 들어 선동적인 정치인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대상은 힘없는 불법 이민자들이다.
사회 안전망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인은 기업의 이익과 돈의 위력이다. 기업의 이익과 돈의 위력은 이제껏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기업 오너들에게는 노동자에게 없는 두 가지 무기가 있었다. 기업 오너들의 모임은 계열사를 중심으로 건설한 대기업 왕국에서 노동자들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사업 조건이 불리해졌다고 느낄 경우, 기업 오너는 얼마든지 사업체와 공장을 옮길 수 있었다. 정부는 기업체가 이전할 경우 발생하는 투자 손실과 더불어 세수원을 상실할까 두려워 법이나 경제 제도 모두 기업의 수익성이 감소하지 않는 방향, 즉 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지해왔다.
물론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게 되면 장기적인 이익을 놓칠 수 있다. 자신들이 더 안전하고(실업급여 및 연금 덕분에), 더 건강하다고(의료 보험 덕분에)느끼는 근로자들은 더 행복하고, 그 결과 고용주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기업 발전에 필수적인 숙련직의 경우 더욱더 그럴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기업체는 중소기업이어서 노동자의 미래를 위한 안전망을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준이 안되는 것은 사실이다. 기업체는 노동자의 행복이나 안위 같은 것을 고려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안전망이 취약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문제는 이때 도입하는 정책이 일반적으로 주먹구구식이고 기회주의적이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정책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경기 불황이 올 때마다 임의적으로 정책을 바꾼다면, 장기적인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채 채택된 부적절한 정책이 국가 전체에 넘쳐흐를 가능성이 있다.
경기침체가 심각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자동 안정 장치 수준을 넘어서 정부가 지출을 확대하게 되면 별다른 효과가 나지 않으며, 그보다는 경제를 통화 정책에 맡기는 것이 경기 회복에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주류 경제학자들은 주장해왔다. 문제는 강력한 안전망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고용 회복 속도가 느려지자 정치권이 최근 발생한 모든 경기 지표를 진정 심각한 불황이라고 평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인들은 조세 정책-감세 및 지출 확대-뿐만 아니라 통화 정책 면에서도 조속히 부양 대책을 모색하라고 정부를 심하게 압박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만일 앞으로도 고용 회복 속도가 계속 느려질 때마다 안전망을 강화하는 정책 대신 임의적인 부양책을 도입한다면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하지 않겠는가?
분명히 그럴 것이다! 임의적 부양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첫째, 경기 침체 상황이 심각하고 오래간다고 생각될 때마다 정부가 선심성 부양책을 도입할 경우, 근로자의 불안은 더욱더 커질수밖에 없다. 정책이 임의적으로 바뀜에 따라 실제로 자신들이 어려운 처지를 당했을 때 정부 부양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만일 유권자가 현재의 실업률과 고용 회복 수준에 걸맞는 대책을 모색하라고 정치인에게 압력을 넣고 그 결과 유권자의 요구대로 정치권이 경기 부양책을 도입한다면, 아주 강력한 성격의 부양책이 도입될 가능성이 크고 또 그렇게 도입된 부양책은 오랫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부양책이 완성될 즈음이면 경제 회복이 이미 진행중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오늘 채택하는 부양책이 경기를 과열시켜 미래에 정부로 하여금 그 열기를 식히기 위해 또 다른 값비싼 정책을 도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주먹구구식으로 채택한 부양책이 권력 남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치인들이 경제 위기 때 도입하는 여러 가지 임의적인 정책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불황이 닥칠 때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선거구에 필요한 프로젝트를 경기 부양책에 끼워 넣는다. 오로지 당선되기 위해 실제로는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프로젝트를 선거 공약으로 남발한 정치인들이 경기 부양책을 그런 프로젝트 수행 도구로 활용하면서 자기 눈앞의 이익을 확실히 챙기는 것이다. 경기 부양 패키지중 3분의 1 이상은 일회성 세금 감면 혜택인데, 솔직히 그런 것들이 경기 부양에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실질적인 대책이 아니라 정치인들에게 선심성 공약을 지킬 기회를 주기 위해 도입된 비현실적인 대책이기 때문이다. 정부 보조금은 마약과 같은 것이다. 그 혜택은 극소수가 누리는 반면, 미래에 발생하는 비용과 후유증은 많은 사람이 나누어 부담해야한다.